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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성어모음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의 일생

 

알버트 슈바이처의 봉사와 희생정신

 

알버트 슈바이처
알버트 슈바이처 -출처 : naver-

 

안녕하세요.

오늘은 인류애를 넘어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를 사랑한 의사, 슈바이처 박사 이야기입니다.

슈바이처는 1875년 독일의 카이저스베르크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슈바이처가 태어났을 때에는 독일 지역이었지만, 나중에는 프랑스에 속하게 되어 프랑스 시민이 되었습니다. 슈바이처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소질이 많아 피아노 연주에 능숙했으며 다니던 교회에서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했습니다.

 

1894년 스트라스부르크대학에 입학하여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으며, 졸업 후에는 철학박사와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슈바이처는 음악에 관심이 많아서 프랑스 파리 유학시절부터 파이프 오르간 연주가로 활약하면서 파이프 오르간의 구조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는 등 음악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어린 환자를 진찰하는 슈바이처
어린 환자를 진찰하는 슈바이처 -출처 : naver-

 

슈바이처 의사가 되다.

1905년 음악가로 활동하던 슈바이처는 우연히 프랑스 선교단의 보고서를 통해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의사가 없어 큰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모교에서 의학공부에 정진하여 1913년 마침내 의학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30세의 나이에 의학공부를 시작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38세의 나이까지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슈바이처의 목표는 오직 열악한 환경의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의학 지식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님과 대부분의 친구들은 아프리카 땅에서 그의 훌륭한 재능과 행복한 삶을 포기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라며 모두 말렸습니다. 오직 가까운 동료인 헬렌 브레슬라우 그리고 몇몇의 친구들만이 그의 목표에 동의해 주었습니다.

 

사회 운동가이자 동료인 헬렌 브레슬라우와 결혼한 슈바이처는 아내와 함께 당시 적도 아프리카(현재는 가봉공화국)로 건너갔습니다. 가봉의 '랑바레네'란 곳에 정착한 슈바이처는 본격적으로 의료 봉사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랑바레네'는 프랑스가 다스리게 되었고, 그때까지 독일 국적이었던 슈바이처는 졸지에 프랑스군의 전재 포로가 되어 프랑스 수용소에 감금되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과 슈바이처
아프리카 사람들과 슈바이처 -출처 : naver-

 

가봉 랑바레네에 큰 병원을 세우고, 노벨평화상을 받다.

슈바이처는 프랑스 수용소에서 독일로 송환된 후, 민간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유럽 전역을 여행하면서 연주회와 철학 및 신학 강연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아프리카 생활을 책으로 출간하여 이에 대한 강연도 하였는데, 그의 의료 봉사활동이 사람들에게 알려져 많은 주목을 끌게 되었습니다.

슈바이처는 이에 힘을 얻어 1924년에 다시 랑바레네로 건너가 의료 봉사활동을 시작했고, 마침내 그곳에 큰 병원을 설립하였습니다. 이 무렵부터 그는 사람들로부터 '세계의 위인', '원시림의 성자' 등으로 불리며 많은 존경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유럽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에 전념한 슈바이처는 1952년 인류의 번영과 세계 평화에 대한 노고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슈바이처는 노벨평화상의 상금마저 아픈 사람들을 위해 모두 사용하였습니다.

 

슈바이처는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그중에 한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슈바이처가 노벨평화상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아프리카에서 파리까지 간 다음, 다시 기차를 바꿔 타고 덴마크까지 가려고 출발하였습니다. 슈바이처가 파리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수많은 기자들이 그를 취재하려고 기차의 일등칸으로 몰려 갔는데 그곳에는 슈바이처가 없었습니다. 기자들이 다시 이등칸으로 몰려 갔지만, 그곳에도 슈바이처는 없었습니다. 기자들은 실망하며 모두 돌아갔습니다.

유독 한 기자만이 혹시나 해서 삼등칸으로 갔더니 그곳에서 슈바이처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슈바이처는 영국 황실로부터 백작 칭호를 받은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삼등칸을 타고 있었던 겁니다.

기자가 "선생님께서 왜 삼등칸에 타신 겁니까?"라고 물었더니, 슈바이처는 "이 기차는 사등 칸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기자가 "왜 불편한 삼등칸을 타고 여행을 하시는 겁니까?"라고 재차 물었더니, "일등칸의 고객들은 저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삼등칸에 제가 도움을 줄 사람들이 많더군요."라고 대답하며 다음 기차를 타기 위해 서둘러 떠났습니다.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슈바이처는 언제나 자신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1960년에 가봉이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하여 가봉공화국이 되었으나 슈바이처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이미 많은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새로 창설된 '적도 성십자 훈장'을 슈바이처에게 수여하기도 했습니다.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에서의 봉사와 인류애를 계속 실천하였으며, 1965년 자신이 처음으로 의료 봉사활동을 시작한 가봉의 랑바레네에서 전 세계인의 애도 속에 사망하였습니다. 슈바이처는 평생의 친구이자 아내인 헬렌 브레슬라우가 세상을 떠난 후 평생 동안 유럽 땅을 밟지 않았으며 아프리카의 자신에 병원에서 평생 동안 열심히 봉사 활동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리고, 슈바이처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아내와 함께 평생 삶의 터전이었던 병원 옆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를 사랑한 슈바이처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를 사랑한 슈바이처 -출처 : naver-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를 사랑한 슈바이처.

슈바이처는 사람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수많은 동물들과 작은 생물들까지도 사랑한 진정한 영웅이었습니다. 그는 랑바레네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바쁜 와중에도 어미를 잃은 동물에 대한 치료를 병행하였습니다. 슈바이처는 사람의 생명만큼 동물의 생명도 정말 중요했습니다. 모든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무리 작은 생명이라 할지라도 존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을 위해 동물을 희생시키는 일이 진짜 필요한 일인지 고민해야 하며, 동물들이 겪는 수많은 고통들을 최대한 줄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이런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주게 됩니다.

 

-오늘의 교훈-

슈바이처는 평생 동안 생명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진정한 의사이다.